[pdf] 보기 위한 병풍, 보여 주는 병풍 | <조선 병풍의 나라2>@아모레퍼시픽미술관

나의 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주황빛 하늘을 바라보며 발가벗은 채 서 있는, 정체 모를 두 청년의 뒷모습.

라이언 맥긴리의 청춘 연작 포스터로, 이 포스터가 눈에 띄는 이유로는 사진 자체의 매력보다도 주황빛 포스터와 강렬히 보색을 이루고 있는 형광 연두색의 벽지의 지분이 클 것이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가장자리를 투명 박스테이프로 고정시켜 놓은 사진 포스터는 원작의 아우라를 그대로 담기 어려워진 지 오래다.

하지만 한때 이 포스터는 단순히 형광 연두 벽지 가리개가 아니라 20대의 출발선을 밟고 있었던 십 년 전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하기도 했다. 수능을 마친 해에 열린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을 방문한 나는, 맥긴리의 사진과 청춘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포스터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수능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진정한 청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설렘에 들뜬 마음을 맥긴리의 사진에 투영해 방 한 켠에 붙여 놓았던 20대 초반의 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며 각양각색의 병풍들을 보는 순간 방 한 켠에서 촌스러운 형광 연두 벽지를 애써 가리고 있는 서양사진작가의 포스터가 떠오른 건 그 때문이다. 전시를 보기 전까지 내게 병풍은 그저 사극의 실내 촬영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실내 장식품 정도였었다. 하지만, 방 한 구석에 붙어있는 낡은 포스터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 있는지를 곱씹어보고 있자니 인물의 뒤에서 인물과 함께 존재하는 병풍이 그저 치장을 위한 장식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당연한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방 안의 포스터가 방 주인의 감정과 취향, 정체성까지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병풍 또한 지금의 포스터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방 주인이 보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마치 우리의 인스타그램과 같을 수도 있겠지.

1. 소유자가 보기 위한 병풍

우선 소유자의 시점에서 출발해보자. 소유자의 시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병풍은 온전히 소유자가 좋아하는 것, 곁에 두고 보고 싶은 것들을 담아낸다. 이야기, 사물, 동물 등 소재의 제한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애호의 대상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소설 ⟪삼국지연의⟫의 명장면을 모아 그린 <삼국지연의도8폭병풍>나, 조선시대 대표적 장편소설 ⟪구운몽⟫의 주요 장면을 그린 <구운몽도8폭병풍>과 같이 당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를 담아낸 병풍은 지금으로 따지면 방안에 붙여 놓은 영화포스터와 닮아 있다.

열 폭에 86쌍의 동물들을 그려 넣은, 다른 요소를 덧붙이지 않고 오로지 동물의 그림만으로 다채롭게 그려진 <백수도10폭병풍>은 흡사 그 모습이 동물 도감 같다. 열 폭에 그려진 동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 병풍을 방 안에 두고자 했던 이는 분명 자연과 동물을 가까이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리라.

그런데 방 안 가장 큰 자리를 내어주어 두고두고 봐야 할 병풍에 애호의 마음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귀와 건강, 더 나아가서는 장수와 번영, 영원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한다.

장수와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은 <장생도10폭병풍>에서와 같이 소나무와 학, 사슴 등 장생을 상징하는 아이콘과 함께 쌍을 이루며 그려진 동물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전시된 병풍 중 무엇 하나 쌍을 이루지 않은 동물이 없는 점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좌) <백수도10폭병풍>전시 전경 / (우) <백수도10폭병풍> 중 세부 동물 묘사

2. 소유자를 보여주는 병풍

일반 실내장식품과 비교했을 때 병풍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소유자의 자아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대리적 성격을 가지는 사물이라는 점이다. 다른 장식품과 달리 소유자의 배경으로서 타인을 마주보는 자리에 위치하는 병풍은 방의 주인이 방문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일면을 피력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일월오봉도’는 그 소유자, 즉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월오봉도8폭병풍>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달, 파도, 적송 한 쌍이 표현된 일월오봉도는 영원 불멸한 국왕의 존재, 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한다. 일월오봉도는 왕이 있는 자리면 그 어디든 왕과 함께 존재했으며, 그 존재 자체로 왕의 현존과 같았다.

<일월반도도12폭병풍>

파도 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왕의 상징인 해와 달과 영원을 상징하는 복숭아를 나란히 배치한 <일월반도도12폭병풍>은 광활한 공간감이 압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왕실의 태평성대를 기원함과 동시에 국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병풍인 만큼 권위와 위압감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병풍이다.

만약 병풍의 소유자가 자신의 가치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유교의 핵심 윤리 ‘효,제,충,신,예,의,염,치’의 글자를 잉어, 용, 거북 등의 상징물을 시각화해 표현한 <문자도8폭병풍> 등을 세워 놓았을 것이다. 가치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자칫 촌스러워질 수 있는데, 핵심 문자들을 단순히 글로만 써 내려가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한 점에서 창의성이 두드러진다.

앞서 지위나 가치관을 표현한 병풍과는 달리 <호피도8폭병풍>과 <호피장막도8폭병풍>은 왠지 현대적으로 다가온다. 압도적인 크기의 호피무늬와 본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사물들을 그려내고 있는 위의 두 병풍은 취향을 담아내는 것을 뛰어넘어 본인의 취향을 과시하고 있다. ‘취향의 과시’라는 점이 여러가지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며 취향과 감각을 개인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지금의 모습과 닮아 있기에 <호피도8폭병풍>과 <호피장막도8폭병풍> 들이 더욱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좌) <호피도8폭병풍> / (우) <호피장막도8폭병풍>

병풍이 단순히 치장만을 위한 실내 장식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때로는 방 주인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담아내기도 하고, 염원하는 것을 드러내기도 하며, 병풍의 소유자 그 자체로서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는 병풍에는 작게는 한 명의 사람이, 크게는 그 사람을 이루는 모든 세계가 담겨 있었다.

방 안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바뀌듯, 병풍 또한 방 주인의 변화를 닮아가며 변화를 거듭하지 않았을까? 전시장을 나서며 기회가 허락된다면 다음에는 개개인의 삶과 함께 그 속에 존재했던 병풍에 대해 조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그러고 보니 이제 박스테이프로도 고정이 힘들어진 맥긴리 사진 포스터도 바꿀 때가 된 듯하다. <끝>

#.pdf

motivation:

레포트를 블로그 글처럼 써버리고 만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크나큰 위기감을 느껴 시작

rules:

완결된 글을 쓴다. → 과제 우려먹기 가능

pdf 형태로 업로드 한다.

wishful thinking:

주 1회 업로드;